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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미학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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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min read
불확실성의 미학
H

I am a Frontend Developer in Seoul, Korea. I am interested in Impact Driven Development.

2023-02-26 내 하루를 돌아본 글.

작년 6월에 다녀왔던 유럽여행에서 알게 된 친구 유라를 만났다. 드문드문 연락만 하다가 둘 다 전부터 보고 싶었던 합스부르크 특별전을 같이 보러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깨서 준비를 마치고 나왔더니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 내린 다음 조금 걷다 보니 박물관이 보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와본 적이 없어서, 처음 본 박물관의 인상은 퍽 마음에 들었다. 꽤 커다란 연못과 그 옆의 정자 그리고 넓은 부지 가운데 커다란 덩치를 뽐내는 본관, 신박하게 생긴 박물관의 외형, 그리고 가운데 뚫린 공간 사이로 보이는 남산타워까지 다 마음에 들었다. 사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이 되게 반가워서 다 좋게 느껴진 것 같기도 하다.

줄이 길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처음 티켓 현장 구매 대기줄을 봤을 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줄이 길어서 깜짝 놀랐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8시 45분에 도착해서 티켓 오피스 오픈 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오기도 했고 주말 아침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찍 전시회를 보러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일요일이라서 평소보다 영업시간이 짧아 판매하는 티켓도 500장 제한이었다. 우리는 500명 안쪽에 줄을 섰지만, 1인당 구매 수량 제한이 없어 매진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희망을 품고 2시간 동안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계속해서 남은 티켓 장수가 점점 줄고 있어서 줄을 서더라도 티켓 구매가 힘들 수도 있다는 직원분의 안내가 반복됐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티켓 오피스 근처에 거의 다다랐을 땐 티켓이 거의 남지 않아서 오늘 전시회를 보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계속 기다렸고, 결국 표가 매진됐다는 안내를 듣고 나서야 줄을 빠져나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2시간 동안 줄을 섰던 터라 티켓 구매를 하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춥고 배고픈 상태로 2시간가량 줄을 섰던 만큼 내 배를 채워줄 음식이 간절했다. 줄서는 동안 먹을 걸 찾아보다가 근처에 있는 용산 아이파크몰 안에 있는 남도 분식에 가서 떡볶이를 먹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려서 얘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새로운 주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평소에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이라서 대화를 할 때 새로운 주제가 별로 없다. 그런데 유라는 여러 활동들을 하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지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았다. 또 평소엔 꿈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얘기할 일이 별로 없는데, 솔직하게 내 얘기를 꺼낼 수 있어서 좋았고, 그걸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있어서 좋았다.

그와 동시에 나와 다른 배경의 사람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친구의 고민 상담 얘기, 동아리 얘기, 셰어 하우스 얘기, 좋아하는 장소, 취미, 습관 등 유라가 살아가는 얘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서, 평소엔 잘 하지 못했던 생각들도 해보게 돼서 좋았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 노들섬 안에 있는 노들서가에 갔다. 2시 50분 언저리에 도착했는데, 운이 좋게도 3시부터 음악 공연이 있다고 해서 기다렸다. 이번 주말 공연의 테마가 드라마 ost여서 가수분들께서 직접 선곡하신 드라마 ost들을 불러주셨다. 호텔 델루나, 나의 해방일지, 나의 아저씨 등 드라마의 ost뿐만 아니라 자작곡도 들려주셨다. 가수님께서 긴장하신 기색이 역력해서 일부러 더 환호하고 박수쳤다. 재밌는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서가에 비치된 책들을 읽다가, 책장에 꽂혀있는 특이한 형태의 '종이'책이 눈에 띄었다. 책의 정체는 작년 노들서가에서 진행했던 행사에서 사람들이 적은 글이었다.

만약

처음엔 사람들이 어떤 내용을 적었을까 궁금해서 펼쳐봤는데,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저마다의 고민과 아픔이 느껴져서 가슴 한 편이 시렸다. 이름 모를 이들이 내가 가졌던 것과 같은 형태의 상처를 지닌 것에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평소 막연하게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남긴 흔적에 위로받는다. 일종의 동지애 때문인 건지 나와 닮은 사람이 여기에 존재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심이 된다. 이와 비슷한 감정을 좋아하는 가수의 에세이를 보면서 느낀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노래를 쓰는 것만큼이나 글을 쓰는 것 역시 내 운명의 한 조각이라고 믿어왔던 듯하다. 비록 나의 재능이 충분치 않고 박힌 심지가 그리 올곧지 못해도 언젠가는 그래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누군가 그러라고 한 사람도 없었거니와 딱히 그래야 하는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감사하게도 음악가로서의 삶으로 나의 생활을 지탱하고 있고 글쓰기에 투신해도 좋을 만큼 이렇다 할 글재주를 가지지도 못했지만, 늘 문제가 되는 불꽃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 불꽃은 성냥 한 개비만 한 주제에 놀랄 만큼 탐욕스러우며 다 타고 나면 고운 재로, 고운 재에서 다시 불꽃이 되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중에 있다. 나는 쥔 부지깽이 하나 없는 그 불꽃의 관리자다. 불은 꺼져서도, 너무 활활 타올라서도 안된다.

불꽃은 내가 읽은 글들을 모두 살라 집어삼키고도 계속 배고프다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급기야는 타인의 문장뿐 아니라 나의 것을, 거기 등 뒤에 숨겨놓은 부끄러운 낱말들까지도 전부 내놓으라고 한다. 그게 남 보이기에 낯 뜨겁거나 한심할 만큼 어설플지라도 별 상관없다는 듯이. 나는 또 쩔쩔매기 시작한다. 가사에서 드러낼 수 있는 정도가 어쩌면 나의 한계일진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과연 무언가를, 과연 쓸 수 있을까?

'밤의 끝을 알리는' (저자: 심규선) 중에서

나는 평소에 하고 싶은 게 굉장히 많은 편이다. 새롭고 신기한 것에 흥미가 쉽게 생기는 편인데, 그만큼 흥미를 잃는 속도도 빠르다. '냄비근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든 꾸준히 하는 게 많지 않아 시작하고 오래 안가 그만두기 부지기수다.

뿐만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걸 좋아해서 글을 가끔 쓰곤 하는데, '냄비'같은 내 성격상 흥미를 느끼는 포인트가 많아 글을 적고 싶은 주제는 많은데 쓰다가 바빠지거나 분량이 많아져서 글 쓰는 시간이 늘어지다 보면 중간에 또 다른 관심사가 생겨 더 이상 작성되지 않고 미완인 상태 그대로 보존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평소에 이런 나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내 상황과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상황이 닮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이상하게도 그로부터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더불어 에세이를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을 적었던 글의 내용도 함께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성냥의 불꽃을 가졌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경험이 있다는 점이 왜 위로가 되는 걸까?

...

나와 같은 경험을 했던 이에게서 나와 같은 존재라는 동질감을 느끼고 공감하고 그로 부터 치유받는,,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나는 당신의 결핍에서 나의 것을 본다.

'밤의 끝을 알리는' 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사람들이 남긴 글을 보며 느껴졌다. 반듯한 글씨체도 아니고, 잘 다듬어지거나 깔끔한 문장도 아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서투름이 느껴져서 좋았다. 나는 그들이 남기고 간 투명한 솔직함에 매료됐다.

내가 글을 통해 만난 그들은 각자 다르지만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함, 두려움, 초조함과 외로움. 그날의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 위에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지금쯤 그들의 상처는 다 아물고 새살이 돋아났을까? 우연히 이곳에 들려 가슴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뒀던 그 마음을 마주하고 종이 위에 연필로 나지막히 고백한 그 날을 기억할까?
그들이 우연히 이곳을 찾아 마음을 고백한 것처럼 나도 우연히 이곳에 들렸다가 그가 남기고 간 진심을 발견했다.

노들서가에서 이런저런 경험들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만약 합스부르크 전시 티켓 구매에 성공했다면 오늘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을 텐데,,"였다. 오히려 이런 젊은 음악가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과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의 솔직함을 담은 글과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들이 나에게 더 값진 경험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노들서가에서 나오니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시 용산으로 돌아가는 다리를 건너면서 아름다운 노을을 봤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오늘 봤던 글이 너무 인상 깊어서 집에 돌아오면서 누나, 친한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내가 봤던 글들을 공유했다. 유라에게서 자신의 친한 선배에게는 깊은 관계를 가진 친구들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그분이 부럽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아보니 나에겐 이미 내가 느낀 감정과 그 글을 나눌 사람들이 충분히 많았다. 이제 더 이상 그 선배가 부럽지 않다.


오늘은 앞으로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은 인상적인 하루였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짜증 내고 화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오늘 우리에게 벌어질 예견할 수 없는 하루를 기대하면서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게 행복한 삶의 조건이 아닐까? 오늘 하루도 참 감사한 날이 아닐 수 없다.

ps. 합스부르크 전시 꼭 보고 만다...

D

불확실한 세상에서 서핑하는 느낌 좋네요 ㅋㅋㅋㅋ 멋져요 형!!

1
H
Hugo Kim3y ago

감사 감사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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